ㅡ 그로서리 스토어를 통해 바라본 트렌드
그로서리 스토리의 사전적 정의는 식료품 소매점이다. 다른 말로는 슈퍼마켓. 해외를 나가면 동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로서리 스토어가 최근 국내에서는 가장 힙한 공간이 되고 있다. 보마켓, 애니오케이션, 먼치스앤구디스 등 힙쟁이라면 한번쯤 인증샷 찍어봐야 하는 필수 방문 코스가 대표적이다. 동네 구멍가게가 도대체 왜 힙플레이스가 된 걸까?
그 이유는 실제 그 공간을 방문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로서리 스토어는 사전적 정의의 그로서리 스토어와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힙스터의 즐겨찾기 장소
일단 핀터레스트를 켜고 GROCERY STORE 를 검색해 보자. 아마 대부분 과일이나 델리, 잼, 베이커리 등을 파는 따뜻한 동네 식료품점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로서리 스토어는 이곳이 국내인지 해외인지, 식료품인지 디자인샵인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1.보마켓
한남동 남산 맨션에서 자그맣게 시작한 보마켓은 현재 신촌에 대형 5호점까지 차리며 그로서리 스토어의 인기를 입증해 내고 있다. 스스로를 ‘동네의 가치를 바꾸는 생활 밀착형 동네 플랫폼’으로 지칭하며 여기저기서 와보는 핫플이 아닌 진짜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을 목표한다고 한다. 상쾌한 컬러감의 파사드와 영문 로고에 이끌려 들어가면 어느새 장바구니 가득 다 먹지도 못할 주스와 과자, 그리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소품이 담겨 지갑과 씨름했다는 후기가 자자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SNS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야외 파라솔과 실내 푸드코트에 앉아 잘 꾸며진 브런치 인증샷을 보고 있노라면 동네 주민이 아니더라도 굳이 굳이 찾아가고 싶은 의욕을 만들어낸다.
2. 애니오케이션
정식 명칙은 리틀넥 애니오케이션 청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최근 가장 핫한 GFFG(카페 노티드, 다운 타우너 등을 운영하는 요즘 가장 잘나가는 F&B 브랜드)에서 런칭한 따끈한 신상 그로서리스토어이다. 이곳의 특징은 바로 줄 서서 먹는 베이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 이렇게 베이글에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베이글을 먹기 위해선 새벽부터 오픈런을 해야 한다. 물론 그로서리 스토어라는 컨셉에 충실하게 좁은 공간에서 와인, 굿즈, 식료품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재미있게도 브랜딩 된 군고구마(?)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3. 먼치스앤구디스
며칠 전 나 혼자 산다에 출현한 세리 언니가 솔드아웃 된 소금 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가게가 성수동 먼치스앤구디스이다. 성수동에 다양한 복합문화공간을 선보이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집단 ‘팀 포지티브 제로’(TPZ)가 운영하고 있는 그로서리 스토어로 내추럴 와인과 예쁜 생필품, 이국적인 식재료가 가득하다. 특히 때마다 바뀌는 엠디 구성이 성수동에 갈 때마다 빠짐없이 들리게 만드는 매력적인 곳이다. 물론 백야드에 함께 운영 중인 카페와 햄버거집은 덤이다.
식료품을 팔지 않는 식료품점
위에 세 사례만 보더라도 국내 그로서리 스토어는 이미 동네 일상적인 물건을 파는 슈퍼마켓이라는 컨셉과는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왜 이렇게 변주 된 것일까?
#. 이국적인 경험을 소비하다
슈퍼마켓 주제에 인테리어는 절대 슈퍼마켓스럽지 않은 게 우리나라 그로서리 스토어의 첫 번째 특징이다. 유럽 어디선가 그대로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와 절대 일상품으로 보이지 않는 핫하고 힙한 생필품들이 가득 차 있다. 동네 슈퍼라면서 접근성과 편리성은 이미 관심 없다. 성수동, 이태원, 청담동 등 핫한 동네에 있거나, 제주도의 저 구석진 주차도 안되는 곳에 자리잡은 게 우리나라 그로서리 스토어이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해외 경험을 가지 못한 이들의 억눌린 욕구가 반영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나가는 글로벌 대한민국 국민들의 높아진 라이프스타일 테이스트가 반영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게 더 큰 이유이던, 이국적인 경험과 쇼핑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인천공항 대신 그로서리 스토어가 지금 소비자들의 니즈에 부합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 다양해진 식문화에 익숙해지다
부라타 치즈와 잠봉, 사퀴테리, 올리브 절임, 그릭요거트, 아보카도, 밤 잼 등 우리나라 식탁의 식재료가 어느 순간부터 글로벌 해지기 시작했다. 최근 1000만 이용자 달성에 성공한 마켓 컬리가 한창 규모를 키워갈 때 늘 상위권을 차지하던 제품은 이국적인 과일과 치즈, 햄 종류로, 이제 소비자들은 유명 백화점 지하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 세계 식료품들을 온라인 클릭 한 번으로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 내추럴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이국적인 안주류들이 덩달아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미식의 시대에 들어선 요즘 소비자들이 만든 변화이다.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맛을 찾아다니는 이들에게 국내 그로서리 스토어는 이국적인 식재료 체험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 취향을 사는 시대
국내 그로서리 스토어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얼리어답터 집단들이 그 중심에 있다는 데 있다. 동네 오래 사는 주민이 그 동네에 필요한 식료품을 직접 파는 게 아니라, 힙한 주인이 자신의 테이스트를 잔뜩 녹여 바잉한 제품 혹은 직접 만든 제품을 소량 펼쳐놓고 판다는 게 다른 점이다. 수제 타르타르 소스와 그래놀라가 유명한 크레타 마켓은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그래놀라를 판매하던 인플루언서가, 와인과 치즈 전문 그로서리인 유어네이키드치즈 또한 전직 IT 마케터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개인 인플루언서뿐만 아니라 앞서 사례로 설명한 애니오케이션과 먼치스앤구디스처럼 GFFG, TPZ와 같은 크리에이터 집단이 운영하는 곳도 많다. 가장 핫한 사람들이 만든 공간인데, 핫플레이스라면 줄을 서더라도 인증샷을 찍어야 하는 우리 소비자들이 과연 빠질 수 있을까? 그로서리 스토어가 이렇게 핫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이유인 것이다.
디자인 편집샵? 이제는 그로서리 스토어!
그런데 이 그로서리 스토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없던 컨셉이 하늘에서 툭하니 떨어진 것 같지도 않다. 지금 유행하는 가구를 비치하고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치장한 뒤 유명 인플루언서들을 불러 인증샷을 올리게 하는 건, 20년 전에는 패션 편집샵이, 10년 전부터는 리빙 & 디자인 편집샵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얼리어답터라면 응당 압구정 청담 패션 편집샵에서 옷을 사고 근처 유명 카페에 들리는 게 수순이었고,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 달을 기다려 빈티지 조명과 가구를 집에 들이고 더콘란샵에서 산 소품으로 인증샷을 올리는 게 힙스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빈티지 선반 위에 예쁜 명란 마요네즈와 밤 잼을 올리고, 컬러풀한 치약과 대나무 칫솔, 인센스를 곁들여 다양한 크림치즈가 가득한 베이글이나 온갓 처음 보는 사퀴테리를 파는 게 지금은 가장 핫한 라이프 스타일이 된 것이다.
즉, 편집샵이라는 컨셉은 그대로인데 단지 그 속에 비치된 재료들이 옷에서 가구로, 지금은 식재료로 넘어온 것뿐이다. 이태리 보그 패션 에디터가 만든 10꼬르소꼬모와 영국의 프리미엄 라이프 스타일을 담은 더콘란샵처럼 기존 편집샵들이 패션과 리빙이라는 키워드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이름을 붙이고 추구하는 취향의 전반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했다면, 이제는 매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식료품과 생필품에서도 브랜드 라벨을 붙여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국내 그로서리 스토어 스테디셀러만 봐도 치약, 인센스, 유리컵, 각종 액세서리 트레이, 그물 장바구니, 명란 마요네즈, 프랑스 밤 잼, 트러플 감자칩, 내추럴 와인 등 일상품이지만 실제로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의식주, 그 중에서도 "식"
한국인은 누구나 인정하는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 의식주 중에서 가장 싸게 경험할 수 있었던 “식”이 패션과 리빙을 넘어 새로운 프리미엄 테이스트로 넘어서고 있다. 기존 일부 상류층을 상대로 했던 패션, 리빙 편집샵과 달리 그로서리 스토어는 편집샵의 기능은 갖추면서 트렌디한 소품들을 다소 합리적인 가격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샤넬에서 가장 도전해 보기 좋은 지갑처럼 말이다. 잼 하나가 50,000원이 넘어도 그 정도 소비는 괜찮다. 가격 장벽이 낮지만 이국적이고 트렌디함은 그 어떤 곳보다 높다. 편집샵을 운영하는 사장님 입장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명품 셔츠보다 유니크한 식료품을 매장에 큐레이션 하게 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맨날 먹던 오뚜기 딸기잼이 아닌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발견한 크렘 드 마롱 (프랑스 밤 잼)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변화는 꽤나 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국적인 식단을 자주 집에서 소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에 어울리는 접시, 식기류에 관심이 옮겨간다. 보기도 좋은 게 맛도 더 있고 그런 것이니까! 이러한 현상 때문에 그로서리 스토어에는 식료품 이외에도 다양한 잡화가 함께 공존한다. 그리고 이 관심은 서서히 식탁을 벗어나 더 넓은 공간으로까지 영향을 뻗치게 되는 건 뻔한 결말이다. 이렇듯 어렵지 않게 ‘식’은 이제 우리 라이프스타일에 있어 가장 힙한 영역이 되고 있다.
그로서리 스토어의 미래가 궁금하다
‘그냥 예쁜 공간에 힙한 제품들이 있으니, 사람들이 몰리는거 아니겠어?’라고 생각했던 그로서리 스토어, 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로서리 스토어가 왜 이렇게 뜨고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컨텐츠가 되어가는지 조금 짐작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뜨고 있는 공간이라도 경쟁자들이 늘어나고 판매하는 제품들이 다 비슷해진다면 과연 지금처럼 그 명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 그로서리 스토어들이 다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순수익을 까보면 실제로는 재미가 없는 숫자가 나올 수도 있다. 아무래도 다품종 소량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생필품이 아니다 보니 재방문과 재구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로서리 스토어의 미래는 어떻게 변해갈까?
1.F&B를 활용한 대형/체인화
다품종 소량으로 운영하는 편집샵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제품 매입가를 낮추고 재구매율을 늘리는 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매입가를 낮추기 위해서는 MOQ(Minimum Order Quantity: 최소 주문 수량)를 늘리는 방법과 직접 생산하는 PB 브랜드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MOQ를 늘리기 위해서는 매장을 한 개가 아닌 여러 개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에 입점을 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만의 독점 물건을 바잉해서 재구매를 유도하거나, 델리를 강화하여 매일 방문을 유도할 수도 있다. 최근 5호점까지 확장한 보마켓이나 더 현대 서울, 가로수길 등 핫플마다 입점해 있는 나이스웨더가 그러한 방향으로 시도 중이며, 애니오케이션처럼 베이글이라는 특정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 사례이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곳들 중, 이렇듯 대형/체인화를 통해 지점이 많아진다면 편세권(편의점+역세권), 맥세권(맥도날드+역세권)을 넘어 그로서리+역세권, 그세권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2.하나만 판다, 소형/전문화
다양한 상품에 F&B까지 취급해야 하는 대형/체인화가 어려운 매장이라면, 반대로 소형/전문화로 세분화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이 분야의 다양한 제품을 만나고 싶다면 꼭 들려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스토어인 ‘생선씨’와 육류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커스텀잇’, 와인 안주인 치즈를 전문으로 하는 ‘유어네이키드 치즈’ 등이 있다. 또 다른 전문화로는 직접 생산을 통한 유일무이한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수제 바질 페스토, 타르타르 소스, 그래놀라로 유명한 크레타 마켓은 다양한 그로서리 마켓들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꾸준한 오픈런을 자랑한다.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크레타 마켓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수제 제품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3.그로서리 스토어를 컨셉으로 한 공간대여/팝업 스토어화
마지막으로는 이미 잘 알려진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처럼 ‘그로서리’를 컨셉으로 활용하여 브랜드 체험공간을 구축하는 것도 하나의 확장이 될 수 있다. 현재 인기를 달리고 있는 그로서리 스토어라는 컨셉을 활용하고 싶지만 여력이 되지 않는 브랜드들에게 공간을 대여하거나, 매대의 일정 부분을 팝업처럼 활용할 수 있게 만든다면 엠디가 없어도 입점하는 브랜드들에 따라 끊임없는 고객 유도가 가능한 이점을 가져갈 수 있다. 그로서리 스토어가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어짜피 콘텐츠와 큐레이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강화하는 것이 새로운 미래 그로서리 스토어의 방향이 될 수 있다.
그로서리 스토어는 이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앞으로 계속 확장되어 갈 테지만,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본질, 즉 “식료품으로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마지셔우드, 예일와 같은 패션 브랜드들부터 휴롬과 같은 대기업 브랜드까지 이미 델리, 부엌, 그로서리 스토어와 같은 컨셉을 활용한 플래그십 스토어나 팝업 등으로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전달한다.
이렇듯 그로서리 스토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 해외의 낯선 컨셉만을 찾아 나서는 것이 정답만은 아니다. 현재 ‘힙’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김씨네 과일라는 티셔츠 브랜드의 경우도, 과일을 파는 트럭에서 컨셉을 착안하여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흰색 다마스와 빨간 과일 바구니로 사람들을 몰고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가지 공장 한 줄 평
ㅡ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 이제 모든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는 먹는 것에서 착안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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