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요 속 빈곤, Z 세대의 콘텐츠 보물 상자가 열리다
몇 달 전부터 국내 음악 시장에 재미있는 이슈가 생겼다. 바로 일본 가수 ‘이마세'의 ‘NIGHT DANCER’가 아이돌 가수 일색이었던 국내 음반 차트에 당당히 차트인을 한 것이다. 틱톡 챌린지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끄는 것 같더니, 이 기세를 놓칠세라 이마세는 어느새 국내에 쇼케이스를 열고 각종 예능 채널에 출연까지 하고 있다.
물론 기존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OST와 시티팝을 중심으로 J-Pop 음원들이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국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메인 차트에 진입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끈 건 전문가들도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인기의 척도가 되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도 J-Pop을 다루는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가장 유명한 메이저 플리 유튜버인 떼껄룩, 쏘플의 다시 찾아듣는 J-Pop 플리는 조회수 400만을 훌쩍 넘고 있다.
사실 다양한 음악을 듣고 접할 수 있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띵띵땅땅”으로 유명한 베트남 음악이나 춤추기 좋은 이마세의 나이트 댄서는 SNS라는 새로운 음원 유통 플랫폼을 통해 유행하기 시작한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J-Pop이 새롭게 뜨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J-Pop은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한국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이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부터 J-Pop은 매니아를 중심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개방 이후에는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엑스 재팬 등 굵직한 글로벌 가수들과 함께 J-Pop의 황금기를 함께 누렸었다.
이후 K-Pop 시장의 눈부신 성장과 일본 경제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하락하면서 J-Pop은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점차 잊혀진 아픈 과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J-Pop 열풍은 새로운 음악 시장의 등장이라기보다는 서브 장르로 취급되던 J-Pop의 컴백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비교 대상으로 많이 거론되는 K-Pop이 글로벌 시장에 중심으로 떠오른 가운데, 퇴물로 취급받던 J-Pop은 어떻게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일까? 그리고 과연 이 현상은 J-Pop을 넘어 J 콘텐츠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수 있을까?
1.스트리밍과 숏폼으로 쇄국정책 벗어난 J-Pop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는데, 바로 일본 음악 시장 규모가 빌보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점이다. 독특하게도 이런 강점은 오히려 일본 음악 시장에 독이 되어, 과거 J-Pop이 한창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을 때 해외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국에서 충분히 규모의 경제를 누리는데, 굳이 해외에 나갈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다(K-Pop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것과 반대).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J-Pop도 이제는 변화를 꾀하고 있다. 세계 음원 트렌드에 맞추어 CD가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환되었고(실제로 일본 음악 시장은 매출의 70% 이상이 CD 즉, 실물 음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젊은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유튜브와 틱톡 등 SNS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틱톡의 경우 챌린지라는 독특한 형태를 통해 전 세계 젊은 층에게 새로운 음악을 알리기가 쉬워졌는데, J-Pop인 이마세의 ‘NIGHT DANCER’와 Aimyon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든가’도 틱톡 챌린지를 중심으로 인지도를 쌓은 뒤 국내 멜론 차트에 진입한 케이스이다. 또한 유튜브의 알고리즘 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음악 장르를 경험해 볼 수 있게 된 것도 J-Pop이 젊은 층에게 “발견”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2.싱어송라이터와 인디밴드, 다양한 장르에 대한 니즈
국내 음반 시장의 경우 아이돌을 중심으로 짧은 길이의 훅이 강한 곡,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 화려한 퍼포먼스와 심플한 가사가 특징이다. 하지만 J-Pop은 싱어송라이터와 인디밴드의 음악이 주류로 긴 길이의 곡들과 독특한 세계관이나 메시지가 담긴 가사들을 차별 포인트로 가지고 있다. 최근 ‘최애의 아이’의 OST ‘아이돌'로 흥행한 요아소비의 경우 소설이나 만화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유닛으로 모든 곡에 원작을 가지고 있다는 독특함이 있는데, 이러한 J-Pop의 매력은 화려한 K-Pop에 지친 Z 세대의 취향을 그대로 저격했다.
국내에서 백예린, 데이먼스이어 등의 싱어송라이터들과 실리카겔, 데이식스와 같은 밴드 아티스트가 Z세대를 중심으로 점차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과 비슷하다. 아이돌 음악에 편중된 한국 시장에 비해 보다 다양한 음악 장르가 존재하는 J-Pop은 Z 세대들에게 취향 발굴의 장이자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3.OTT로 친근해진 일본 콘텐츠
J-Pop이 다시 인기를 얻은 배경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일명 ‘오타쿠’나 보던 매니아 콘텐츠로 취급받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가 OTT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다양한 콘텐츠를 소싱하며 ‘귀멸의 칼날’, '체인소맨', ‘최애의 아이' 등 누구나 일본 애니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도 이례적인 극장가 열풍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콘텐츠들의 주제곡을 통해 J-Pop에 입문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요네즈 켄시의 ‘KICK BACK’은 ‘체인소맨’의 OST로 쓰이며 일본 아티스트 최초 스포티파이 글로벌 차트에 랭크되었고,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오세이사)’의 OST인 요루시카의 ‘좌우맹’은 같은 해 12월 유튜브 뮤직 한국 주간 차트에서 2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풍요 속 빈곤, Z 세대가 발견한 새로운 보물 상자
이렇게 Z 세대를 중심으로 한 J-Pop의 컴백은 일본 음악 시장의 시대에 맞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음원 플랫폼인 숏폼의 부상과 다양한 음악 장르를 찾아 즐기는 니즈가 맞아떨어진 것이 그 배경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J-Pop의 부흥기를 Z세대가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90년대 J-Pop의 황금기를 누렸던 세대의 향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시기를 겪어보지 못한 Z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파고 또 파고, 알고리즘이 이끄는 디깅 문화
Z 세대에게 있어 “디깅” 문화는 그들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일명 과몰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늘 새로운 자극과 취향을 찾아 모든 것을 디깅한다. J-Pop은 K-Pop의 대안을 찾아 유튜브를 헤엄친 Z세대가 발견한 숨겨진 보물 상자와도 같다. 어쩌다 보게 된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와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OST는 화려한 K-Pop 과는 또 다른 레트로한 감성을 선사하고, 우연히 보게 된 틱톡 이마세의 나이트댄서 챌린지는 어느새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이어져 일본 아이유로 불리는 Aimyon에 다다르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지독한 알고리즘은 유튜브 플리의 섬네일 제목처럼 “제이팝 붐은 온다. 한 번쯤은 들어본 J-Pop 숨은 명곡 찾기”, “J-Pop 입덕을 위한 플리”, “듣자마자 반할 수밖에 없는 J팝" 등 Z 세대에게 새로운 음악 디깅의 경험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Z 세대가 좋아하는 네오 노스탤지어 감성의 J 콘텐츠
또한 이렇게 디깅한 J-Pop은 특유의 몽환적이면서 빛바랜 청춘과도 같은 아련하고 청량한 감성을 뿜어내며, 90년대 네오 노스탤지어 감성에 꽂혀있는 Z 세대를 자극한다. 겪어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닌, 발전하는 기술과 불안정한 정세 속 앞으로 절대 오지 않을 과거의 호시절에 대한 판타지를 의미하는 네오 노스탤지어 감성은 최근 Z 세대를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J-Pop 중에서 가장 이런 감성을 잘 드러내는 시티팝 장르가 특히 한국에서 더 사랑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며, 90년대 감성의 끝판왕인 슬램덩크와 타임슬립, 세기말 감성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노 재팬과 일본 콘텐츠 소비는 달라
즉, J-Pop의 부흥에는 Z 세대의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디깅 컬처와 현재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네오 노스탤지어 감성의 일본 콘텐츠가 만나 더 시너지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노노 재팬 속에서 젊은 세대의 이러한 움직임을 탐탁지 않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달리 ‘반일 감정’이 확연히 적은 것이 특징으로,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2023년 2월 2030세대 6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전체 42.3%가 일본에 대한 인상이 ‘긍정적’이라고 답했는데, ‘부정적(17.4%)’이라고 답한 이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지금 젊은 세대 사이에는 일본에 대한 역사문제와 문화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일본이 역사에 대한 반성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 음악과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점은 일본 젊은 층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 양국의 문화 교류에 있어 과거와 많이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J-Pop을 넘어 J-Wave로
Z세대의 새로운 디깅 컬처가 된 J-Pop. 일부 매니아가 즐기는 반짝 인기로 그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의 마침표를 찍을 것 같다는 전망들이 나오면서, 일본의 강점인 소프트파워, 그중에서도 엔터테인먼트와 콘텐츠 사업 등이 점차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의 문화 교류도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중국 시장이 한한령으로 인해 몇 년째 한국 가수들의 공연이 금지되면서, 일본 음악 시장은 K-Pop의 새로운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한국 아이돌 가수 ‘세븐틴’은 최근 지난달 23일 발매한 첫 일본 베스트앨범 '올웨이즈 유어스(ALWAYS YOURS)'로 해외 아티스트 최초 2개 작품 연속 첫 주 판매량 50만 장을 넘기는 쾌거를 거뒀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최근 발표한 음반 'Ima -Even if the world ends tomorrow-‘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세기말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마치 일본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일 양국 Z 세대의 네오 노스탤지어 감성을 잘 녹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일본 아티스트들의 한국 진출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J-Pop 부흥의 원조인 이마세의 경우 국내 인기 아티스트인 빅나티와 함께 ‘NIGHT DANCER’의 한글 버전을 발매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난 6월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엔딩곡에 참여한 일본 인기 록 밴드 10-FEET가 첫 단독 내한공연을 갖는 등 점차 규모와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실제로 J-Pop의 이러한 부흥은 음악을 넘어 다양한 J 콘텐츠의 부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코로나 이후 일본 여행은 꾸준히 증가 추세(5월 기준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방문객 약 190만 명 중 한국인 51만 명으로 가장 많음)에 접어들었고, 일본 주류 문화인 하이볼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술이 되었다. 일본의 대표적 IP 사업인 산리오, 치이카와, 빤쮸토끼와 같은 캐릭터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져서, 지난 6월에 진행된 빤쮸토끼의 단독 팝업 스토어의 경우 2시간 웨이팅이 기본일 정도였다.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말할 바 없고, 최근에는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Z 세대의 성지인 성수동에서 신작 출간 팝업을 연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Z 세대의 호기심과 레트로 감성이 찾아낸 J-Pop의 부흥이 90년대 일본 콘텐츠의 황금기를 다시 재현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분명한 건 이러한 흐름이 새로운 J-Wave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한 국가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이 모두 함께 즐기는 새로운 문화교류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가지 공장 한 줄 평
ㅡ 가지공장이 추천하는 J-Pop 입덕 플리: 이마세로 시작해 Aimyon을 거쳐 요네즈 켄시와 요아소비, 바운디로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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